HBO에서 체르노빌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다시 주목받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 사고. 왜 사고가 발생했고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이해하기 쉽고 핵심만 추려서 확인해 볼게요.
1986년 4월 26일에 우크라이나 최초의 핵발전소였던 체르노빌 원전이 폭발했습니다. 체르노빌은 우크라이나 키예프 남쪽 130km 떨어져 있는 도시였고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자력 발전 사고 Top1입니다.(국제 원자력 사고 등급 중 7등급을 받은 2개의 사고 중 하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 사고의 원인
1. 기술적인 원인을 알기 위해 이해해야 하는 원자로 작동 방식.
원자로가 전력을 생산하는 원리를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원자로에서 핵분열 때 엄청난 열이 발생하는데 그 열이 물을 수증기로 만들고 그 수증기가 터빈을 돌리면서 발전기에서 전력이 생산되는 거죠.
핵분열을 위해서 중성자라는 물질이 필요한데 이게 핵분열의 반응속도를 낮춰주는 감속제 역할을 합니다.
2.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건설 배경부터 빨리빨리 성과주의가 있었다.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는 당시에 검증된 방식이었던 가압경수로 형태 대신 아직 충분히 안정성이 확인이 안 된 RBMK 원자로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RBMK 방식의 원자로는 흑연을 감속제로 쓰지만 단점으로 제어 어렵고, 다른 원자로 유형에 비해 낮은 출력에서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소련경제 부활시키려고 단기간에 성과를 내려는 소련 관리층들이 그 배후에 있었고요.(체르노빌 원전이 RBMK 방식으로 채택된 것도 권력 싸움으로 인한 것이었음.)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일의 현장에서 있었던 일
1.1986년 4월 말 체르노빌 발전소 정기수리로 가동 중단된 동안 시험을 하나 합니다.
선풍기도 전원을 껐다고 날개가 바로 안 꺼지듯이 원자로도 마찬가지인가 싶습니다. 전원은 꺼졌지만 원래 돌던 터빈의 관성이 남아 있는데, 이 힘으로 얼마나 전력이 나오는지 시험)
2. 출력을 낮추는 동안 제어봉 스위치가 오작동해서 원래는 22% 수준으로만 낮추는 것이 목표였는데 조작하는 사람 실수로 거의 터빈 안 움직임이 정지될 정도로 출력이 떨어짐. 이걸 살리려면 제어봉 통제하는 자동 제어장치 대신 수동으로 제어장치로 제어봉 끌어올려야 함. 그래서 수동 제어장치로 할 건지 아니면 시험을 포기할 건지 선택의 기로에 있었음.
3. 원자로 가동 중지 최종 책임자 겸 부수석 엔지니어였던 댜틀로프는 시험을 계속하기로 결정.
4. 많은 제어봉으로 계속 터빈 안의 움직임을 끌어올림. 당연히 여러 경고 신호가 계속 울려되었지만 무시됨. 너무 출력이 높아지니까 긴급 정지 시스템과 제어봉 재삽입을 했지만 RBMK 원자로의 결함 때문에 핵반응 속도는 오히려 증가. 정상 출력의 100배까지 상승하게 됨. 그리고 증기 폭발과 함께 원자로 위를 덮은 200톤 콘크리트 덮개가 공중으로 날아갔습니다.
5. 이미 체르노빌과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레닌그라드 원전사고가 있었음
똑같은 RBMK 방식의 원자력 발전소였고 노력한 기술자가 제어봉을 추가로 삽입하면서 간신히 사고를 막았지만
국제 원자력기구 핵 오염 안전 기준에 비해 30만 배가 넘는 150만 퀴리의 폐기물 대기에 누출됨. 상황 설명은 없이 제어봉 개선 조치만 기술자들에게 내려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결과
1. 가장 인근 지역인 프리피아트, 야로프 역에 거주하는 5만 명 강제이주,
(프리피아트는 발전소 근로자 복지를 위해 만들어진 최첨단 계획도시였습니다.)
그 이후 강제이주 반경이 넓혀지며 11만 6천 명 추가로 이주했고요.
2. 북풍 때문에 80%의 방사능 낙진이 벨라루스에 떨어짐. 2020년까지도 벨라루스 국토 22%는 방사능 오염지역입니다.
3. 스웨덴 원전의 방사능 경보가 울림으로 사실이 알려지고 국제여론과 국내 여론이 다 나빠지자 그제야 소련은 재난 사실 인정했습니다.
4. 유서로 죽음 각오한 군인 및 발전소 관계자 28명 결사대 결성으로 모래와 콘크리트 5천 톤으로 방사능 유출되는 원자로 봉인되었습니다. 그 28명 모두는 몇 개월 뒤 사망하게 됩니다.
5. 그리고 지하수와의 접촉을 막고 지붕을 씌우며 비교적 단시간에 사고 수습되었습니다(일본 2011년 사고에 비해).
이와 관련된 군인 및 관계자 인력동원만 사고 직후 2년 동안 24만 명, 90년까지 60만 명 그중에 다수가 생명을 잃거나 방사능 피폭으로 건강을 해침, 그 후손들의 기형, 희귀 암 등의 고통받았고요. (그중 절대다수는 18-20세 사이의 징집병)
6. 현재도 체르노빌 인근 지역은 정상치를 크게 웃도는 방사능 수치 보임
7. 충격.. 이것이 사실인가
체르노빌 사고 6개월 후 폭발하지 않은 남은 3개 원자로 다시 가동함; 2000년 최종 폐기함
p.s) 일본 원자력발전에서는 핵연료 봉인 포기 (도쿄전력은 사기업이므로 공익개념 없음)
따라서 도쿄 방사능 수치 20배 넘게 오름 동해의 세슘 농도가 4년 만에 2배 넘습니다. 얼마나 많은 양의 방사능 오염물질이 바다로 유출된 걸까요. 그것을 유추할 만한 통계치 하나 얘기드리자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에 사용된 핵물질 약 10kg 정도인 것에 비해 핵발전소에서 사용되는 핵물질은 약 100톤에 가깝습니다.
역사적 의미
-체르노빌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요구하는 서방과 소련 대중의 압박이 심해지자
고르바초프의 비밀주의 식 운영 중단되었습니다
-소련 기자들이 국가 핵심 인력이었던 원자력 산업 종사자들을 취재하는 것은
소련 언론 역사의 전환점 결과적으로 소련 붕괴 시작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대한 원인과 결과 그리고 역사적 의미까지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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